저지는 단순히 컬러를 구분하는 수단을 넘어 팬들에게 역사, 방향성을 포함한 클럽의 정체성을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창구다. 특히 프린팅과 자수를 구현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표현의 수단과 부위가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차별화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구단 혹은 브랜드들의 ‘그릇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라는 고민은 ‘어떤 그릇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에서 ‘어떤 그릇의 어떤 부분에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까’로 발전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올해 발매된 저지들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고자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19-20 홈
먼저 맨유팬 들에게 지난 시즌 디자인을 벗어났음에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맨유의 이번 홈 저지는 너무나도 안 풀리는 최근 성적(최전성기에 비해)을 인지한 탓인지 가장 잘나가던 시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트레블 달성 20주년이기도 하니 말 맞추기도 쉽다. 엠블럼은 트레블 당시 맨유 컵 셔츠의 엠블럼 형태를 가져왔다. 엠블럼을 빙 둘러싼 방패 문양은 맨체스터 도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양 소매 끝에는 수상한 숫자들이 프린트되어 있는데 이는 ‘누 캄프의 기적’, 뮌헨과의 챔스 결승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역전을 일궈낸 두 골의 득점 시간이다. 옆구리 아래쪽엔 바르셀로나에서 1999년 5월 26일 트레블을 달성했다는 문구가, 밑단 안쪽에는 리그, FA컵, 챔스 우승 날짜가 각각 프린트되었다. 지금까지 트레블을 달성하고 이렇게까지 생색을 낸 저지는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즌은 워낙 드라마틱 했다. 리그에서는 아스널에게 승점 1점 차로 우승, 챔스에선 91분과 93분에 역전을 이뤘으니. 심지어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트레블이라고 한다. 아마 이번 시즌에 발매된 저지 중 가장 많은 디테일을 보유했을 것 같은 이 저지는 맨유 팬들에게 간만에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근사한 저지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들어준 공장 사장님들께 항상 감사하자.
2.바이에른 뮌헨 2019-20 홈
알리안츠 아레나의 외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다이아몬드가 연결된 이 패턴은 흔히 ‘아가일(Argyle)’로 불리는데 이는 바이에른 지방의 상징이라고 한다. 뮌헨의 엠블럼에서도 볼 수 있는 이 패턴은 2019-20시즌 홈 저지의 메인 그래픽으로 활용되었다. 픽셀 그래픽으로 표현된 아가일 무늬는 클럽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번 시즌 저지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완성했다. 목뒤에는 ‘Mia san mia’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번 시즌에만 볼 수 있는 디테일은 아니다. 이는 ‘Wir sind wir(우리는 우리다)’를 바이에른 지방 사투리로 표기한 것이며 클럽의 모토다. 선수명이 프린팅되는 위치에 팀명을 배치하는 것이 흔한 방식은 아니지만 이 ‘Mia san mia’ 바로 아래라면 이해가 쉽다. 표현은 일반적인 프린팅으로 큰 특징은 없다.
3.도르트문트 2019-20 홈
어쩌다 보니 다섯 개의 칼럼 중 네 개에 등장하는 도르트문트다. 사심보다는 그만큼 멋진 저지들이 많다고 이해해주시길. 올해로 클럽 창단 110주년을 맞이하는 도르트문트는 이번 저지에서 그 의미를 수줍게 새겼다. 목 안쪽 밴드를 활용해 ‘110 JAHRE – GESTERN – MORGEN – FÜR IMMER – BORUSSIA – DORTMUND’라는 문구를 표현했는데, 직역하면 ‘110년 – 어제 – 오늘 – 내일 – 언제나 – 보루시아 – 도르트문트’ 정도. 그들의 모토인 “진정한 사랑(Echte Liebe)”와 비슷한 문맥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4.토트넘 2019-20 홈
손흥민이 입게 될 토트넘의 새로운 홈 저지 역시 맨유와 마찬가지로 팬들의 환영을 받는 중이다. 요상한 스트라이프를 뒤로 하고 다시 깔끔하게 돌아왔다. 디테일을 살펴보자면 소매와 넥라인에는 클럽의 애칭인 ‘SPURS’ 타이포가, 목 안쪽에는 클럽의 슬로건인 ’TO DARE IS TO DO’가 새겨져있다. 이 문구를 번역하면 대략 ’하면 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이키의 ‘Just Do It’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저런 디테일도 있고 작년에 비해 깔끔해졌다고는 하나 스퍼스 저지는 ‘아무 것도 없었던’ 나이키의 첫 시즌, 17-18시즌이 일품이지 않았나.
5.리버풀 2019-20 홈
리버풀이 품었던 감독들을 읊어보자. 팀을 성공적으로 리빌딩하고 14년 만에 그렇게 염원하던 빅이어를 들어 올린 현재의 위르겐 클롭과 14년 전의 ‘베법사’ 베니테즈 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EPL 출범 이후 황금사자 패치를 달아본 적이 없다 보니 더더욱 그런 듯하다. 하지만 EPL 이전 리버풀은 이렇게까지 리그 우승에 목마른 팀은 아니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지휘봉을 잡은 밥 페이즐리는 9년간 리그, 유러피안컵(UCL의 전신)을 포함해 총 13개의 트로피를 따냈다. 클럽은 이때가 사무치게 그리웠나 보다. 이번 홈 저지에 페이즐리 감독 시절의 줄무늬 디자인을 다시 꺼냈다. 이걸로 모자랐는지 밥 페이즐리의 시그니처를 새겨놓았다. 클롭이 EPL 트로피까지 가져온다면 아마 다음 시즌 홈 저지는 클롭 얼굴이 새겨지지 않을까? 목뒤에 있는 횃불과 ’96’이라는 숫자는 1989년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심볼과 희생자들의 숫자이다.
6.대구FC 2019 ACL 홈
마지막 저지는 국내에서 찾았다. 지난 시즌 깜짝 FA컵 우승과 함께 이번 시즌 구단 사상 첫 ACL 출전, 새로운 홈 구장으로의 이전 등 대구FC의 이번 시즌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새로운 킷 스폰서도 만났다. 포워드에서 제작한 이번 시즌 킷은 리그와 ACL 킷으로 나뉜다. 분량과 필력의 한계로 오늘은 ACL 홈 킷만 살펴보는 것으로. 아마 이 저지에 대한 정보가 오늘 중 가장 확실한 소스로 공신력은 99.9%정도로 예상한다. 창단 초부터 사용했던 하늘색을 바탕으로 표현한 그라데이션은 높아질수록 짙어지는 하늘을 표현한 것으로, 대구FC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길 바라는 염원과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방금 포워드와 오버더피치의 최호근 아트디렉터에게 물어본 결과).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경계는 DGB대구은행파크의 독특한 기둥 모양에서 영감받았다. 엠블럼 뒤쪽, 안감에는 이번 시즌의 모토로 삼은 ‘SKY IS THE LIMIT(한계는 없다)’라는 문구가 부착되어있다. 여타 ACL에 출전하는 클럽들이 그렇듯 태극기도 잊지 않았는데, 엠블럼 위에 핀 버튼처럼 귀엽게 올라있는 태극기는 열 부착식으로 표현되었다. 참, 이번 대구FC의 선수용 저지는 엠블럼, 브랜드 로고, 스폰서 로고, 족택, 쿨링도트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열 부착으로 표현했다. 이는 일반 승화 전사, 자수 등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표현력과 질감에서 우수한 면모를 보인다.
최근 브랜드의 표현력과 클럽의 역사 재조명으로 새로이 발매되는 저지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100단위로 기념하던 창단이 시티는 올해 125주년, 도르트문트는 110주년 등 그 주기가 짧아져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몇 주년이던, 과거의 어떤 행적이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주요 인물이던, 새로운 팬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다양한 시도는 언제든 환영이다. 지난 주말 리버풀과 노리치의 경기를 시작으로 2019-20 유럽 축구가 개막했다. 올해는 어떤 역사가 쓰이고 어떤 저지들로 표현될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지갑을 어떻게 털어갈지. 유심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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