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 되면 세상에 기념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구촌 열풍 덕분에 동서양 각국 전통 챙기는 것도 벅찼는데, 거대 과자 기업들의 마케팅까지 더해져 뿌리를 알 수 없는 기념일들까지 챙기려니, 친구, 연인, 가족 사이가 괜히 오묘해졌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참, 이렇게 수많은 기념일이 있는 와중, 왜 레플러들을 위한 기념일은 없는 것일까? 그런 의미로 부담 없는 기념일을 오버 더 피치가 제안해보고자 한다. 이름하여, 11월 11일 ‘세로 스트라이프 저지 데이!’ 기념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투덜대고 나서 바로 기념일 생성이라니, 태세전환이 그럴듯하지는 않지만 대신 부담스럽지 않은 방법을 택했으니 조금만 더 읽어주길.
11월 11일 세로 막대과자 데이, 숫자 쇼핑몰 데이 등등 그런 날. 몸매마저 마르고 길어 보이게 해준다는 그 세로 스트라이프 무늬 레플을 꺼낸다. 입는다. 끝. 상당히 간단하지 않은가? 특별한 지인에게 올해도 긴 막대 과자를 선물하기엔 심심한 당신에게는, 레플러다운 선물로 세로 스트라이프 무늬의 클래식 저지 선물도 생각해볼 만하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2019년 11월 11일부터 신설된 ‘세로 스트라이프 저지 데이’를 기념하기에도 좋고, 살짝 말랐으면 하는 친구들에게 빼빼로 대신 선물하기에도 좋은 세로 스트라이프 클래식 저지들을 소개해본다!
Bayer 04 Leverkusen 2000-01 홈 #13 BALLACK
한국의 팬들에게는 손흥민 선수가 활약했었던 구단 중 하나로 익숙한 바이어 레버쿠젠. 그들의 전성기에는 지금의 유니폼 디자인에선 찾아보기 힘든 세로 스트라이프가 함께 했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의 전천후 미드필더로 도약한 미하엘 발라크 영입과 함께 영광의 시대를 누렸는데, 세로 스트라이프 디자인을 유지하고 맞이한 2001-02년에는 무려 분데스리가, DFB-포칼컵, 챔피언스리그에서 트리플 준우승을 달성하는,,, 2% 부족한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2% 부족한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어 왜 두 번 써지지? 어 왜 두 번 써지지?
굳이 11월 11일 특집의 첫 번째 저지로 바이어 레버쿠젠의 2000-01 시즌을 선정한 이유는, 이 시즌 저지의 컬러 조합이 그 길고 마른 막대 과자의 대표적인 컬러 조합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킹은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미하엘 발라크. 참고로 발락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의 준우승까지, 소속팀과 국가대표팀 포함 쿼드러플 준우승을 달성하는 기염을…
Juventus F.C. 2012-13 홈 #21 PIRLO
사실 세로 스트라이프 저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구단 중 하나가 아닐까. 바로 이탈리아의 그 구단. 그 구단은 몇몇 시즌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키컬러인 블랙&화이트 조합을 활용한 세로 스트라이프 디자인을 꾸준히 도입하고 있는데, 이 시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집이 특집이니만큼 쿠키앤크림 막대과자가 생각나기도 하는 유벤투스의 2012-13 저지는 콘테 감독과 함께한 두 번째 시즌이었으며, ‘역시나’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한 시즌이었다고. 유벤투스는 2011-12 시즌부터 2018-19 시즌까지 현재 리그 8연패중이며, 올해 또한 순항 중이다. 지난여름 우리에게 애석함을 안긴 구단이긴 하지만, 세로 스트라이프 디자인 소개에 깔끔한 흑백 조합의 ‘클래식’을 포기하긴 어려웠다. 안티 유벤투스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대체재라면 뉴캐슬 유나이티드 정도가 있겠다.
마킹은 유벤투스의 리그 독주의 중춧돌이 된 전설적인 패스 마스터 안드레아 피를로. 유니폼 목 뒤에 적힌 ‘Vincere non è importante, è l’unica cosa che conta.’ 는 유벤투스의 명예 부회장까지 지낸 구단의 레전드 ‘잠피에로 보니페르티’가 남긴 말로, ‘승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숫자일 뿐이다.’ 라는 뜻. 유벤투스에서 뛰는 선수들과 팬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 그들의 모토 중 하나로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다.
Blackburn Rovers 1994-95 어웨이
‘내가 축구 좀 옛~날부터 봤는데 말이야.’ 라고 언급하길 좋아하는 레플러라면 관심을 가져볼 저지. 무려 세기를 뛰어넘어 1994-95시즌 블랙번 로버스의 저지다. 구단의 저지 디자인 역사상 세로 스트라이프 패턴을 시도한 적이 손에 꼽는데, 마침 그들의 전무후무한 우승 시즌에 세로 스트라이프를 입었다는 점이 괜히 의미 깊어서 선정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세로 스트라이프 디자인 자체에서 축구라는 스포츠의 근본이 느껴지기도. 이 시즌 블랙번 로버스의 득점왕은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공격수 앨런 시어러. 어린 나이에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그렇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 되어버렸다는 아픔이 있다고 한다.
단추의 배치부터, 넥라인, 칼라의 모양까지 소위 ‘예스러움’이 잔뜩 묻어나온다. 선뜻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는 어렵겠지만, 챔피언십 리그로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블랙번 로버스를 응원하는 팬이 있다면, 그 과거의 반짝임을 간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념하기 좋은 저지가 아닐까?
Tottenham Hotspur 1995-96 어웨이 #9 ANDERTON
지금의 화이트-네이비 조합의 비교적 깔끔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는 토트넘 핫스퍼. 그들에게도 난해란 그라데이션 패턴 대신 축구의 근본 디자인을 구사했던 때가 있었다. 네이비-퍼플 조합 세로 스트라이프는 사실상 기성복에서 볼 수 없는 색상 조합이라고 봐도 무방. 우리가 굳이 수많은 옷을 두고 레플을 챙겨 입는 데에는, 바로 이런 생소한 조합을 일상 속으로 녹여낼 수 있다는 점도 있지 않을까? 이 유니폼을 착용한 1995-96시즌 토트넘이 특별한 시즌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레플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없는 PONY 사와, 빅 토트넘 (구)로고, 휴랫 팩커드 사 스폰서 로고, 목 뒤 예비 단추까지.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디자인만으로도 특별한 저지라고 할 수 있겠다.
마킹은 토트넘의 레전드 윙어로 꼽히는 대런 앤더튼. 입단 초기에는 9번을 달았고, 1999-00시즌부터 7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토트넘의 역대 7번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로 베컴이 등장하기 전 잉글랜드의 주전 오른쪽 윙어로 활약하기도 했다. 같은 7번을 단 손흥민 선수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이며, 앤더튼은 구단 레전드로서 손흥민 선수를 지지해주는 발언으로 국내에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
Arsenal F.C. 2010-11 어웨이 #8 NASRI
앞서 소개된 세로 스트라이프들에 비해선 다소 무난한 축인 아스널의 2010-11 어웨이 저지. 약간 약한 느낌은 있지만 다시 한 번 특집이 특집이니만큼, 누드 막대 과자의 패키지와 비슷한 색감이라서 선택했다고.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된 벵거 감독의 4이언스가 과학처럼 위력을 발휘할 때로, 이 시즌 또한 챔피언스 리그는 16강에서 탈락,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4위로 마감하였다…
나이키가 킷 스폰서인 시절의 아스널 저지들은 그들의 성적처럼 언제나 준수한 느낌이다. 이 시즌 어웨이 저지의 경우에도, 구단의 어웨이 키 컬러인 노란색과 버건디를 축구계에서 흔치 않은 핀스트라이프로 적용한 감각이 돋보인다. 11월 11일을 맞이하며 내가 입기에도, 누구에게 선물하기에도 무난한 선택.
마킹은 구너들 가슴의 못 중 하나인 사미르 나스리. 해당 시즌, 나스리는 구단과 벵거 감독의 체제에 순조롭게 적응을 마치고 전체 15득점으로 팀 내 득점 2위를 차지하는 등 준수한 시즌을 보냈다. 그렇다. 그렇게 구너들의 기대치만 높여놓고, 맨체스터 시티로 돈이 아니라 ‘우승’ 을 위해 떠나갔다고.
(번외) Celtic F.C. 홈 2003-04 #7 LARSSON
세로 스트라이프 특집에 갑자기 가로 스트라이프로 대표되는 구단이라니 무슨 일인가? 싶은 독자들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이유를 밝힌다면, 11월 11일은 단지 막대 과자 기념일일 뿐 아니라 ‘농업인의 날’ 이기 때문에, 어떻게 뽑아내도 새마을 운동이 함께 연상되는 셀틱의 저지를 마지막으로 선정하게 되었다고. 여담으로 농업인의 날이 11월 11일인 이유는 한자 11(十一)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로, 11월 11일을 세로 스트라이프 입는 날로 정하긴 하였지만, 셀틱의 가로 스트라이프 정도는 예외로 허용해주도록 하자. 다만, 가로 스트라이프는 말라 보이는 효과는 없으니 주의할 것.
마킹은 셀틱이 배출한 월드클래스 공격수 라르손. 셀틱의 2000년대 초반 성공 역사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선수로, 스웨덴 국가대표로도 활약. 우리가 잘 아는 즐라탄의 유망주 시절 이상적인 빅&스몰을 구축하기도 했었다. 2003-04시즌은 라르손이 셀틱과 함께한 마지막 시즌으로, 라르손과 함께 한 7년간 셀틱은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스코티쉬컵 우승, 2번의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11월 11일 근처만 되면 온 세상이 막대 과자로 가득 차곤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막대 과자를 주고받는 거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 지가 오래다. 못 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빼빼로데이’가 알고 보면 ‘빼빼로’로 처럼 빼빼해지길 바래~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젠 세로 스트라이프 저지 입고 말라 보이길 바래~ 하는 게 또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축구 저지의 스트라이프 디자인이 색상 조합에 따라 때론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세로 스트라이프가 우리를 말라보이게 해준다는 사실과 함께, 어떠한 색상 조합도 왼쪽 가슴에 떡하니 박힌 구단 마크 하나 있으면 또 자존감 가득 챙기는 것이 진정한 레플러의 마음가짐 아니겠는가? 우리는 당신들의 도전 정신을 응원한다. 다가오는 11월 11일. 이 칼럼을 핑계 삼아, 마음껏 꺼내 입어보자.
글 – 정인천 에디터 (@jeongincheon)
아트워크 디자인 – 안도희 디자이너 (@dohee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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