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의 친구들 단톡방 핫이슈는 다름 아닌 ‘탈모’이다. 전 세계 남성 20대 후반, 30대 초반이면 결혼 상대보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 ‘탈모 위험’ 아니겠나. 아침이면 머리맡을 보며 먼저 떠나버린 머리카락 친구들을 추모하고, 하루하루 정수리 셀카를 찍으며 서로의 진행상황과 탈모 솔루션을 공유하는 것이 마냥 남일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 ‘풍성충’ 이었던 과거는 역시나 그저 과거일 뿐. 운명을 운명으로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순간이 힘겹지만 대신 영감을 주었다. 탈모 앞에도 당당했던 어린 시절의 숱 없는 우상들이 생각난 것. 그런 의미로 상대선수의 압박수비와 거친 태클 뿐 아니라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밀었던 그들을 떠올려보며, 빛나는 선수들의 가장 빛났던 저지들을 오늘 반추해보고자 한다.
-앨런 시어러 1996-97 뉴캐슬 유나이티드 홈
삼사자 군단과 뉴캐슬의 전설적인 공격수 앨런 시어러. 블랙번 시절 득점왕과 함께 소속팀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했던 시어러는 당시 최강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강력한 링크가 있었지만, 시어러의 우상인 케빈 키건이 감독으로 있던 고향팀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마음이 더 기울었다. 당시 기준 이적시장 최고액이었던 1500만 파운드를 기록한 시어러는 빛나는 몸값만큼이나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블랙번 시절 2시즌 연속 득점왕에 이어 뉴캐슬로 이적한 1996-97 시즌까지 득점왕을 차지, 3시즌 연속 득점왕의 기염을 토하며 왜 그가 최고의 득점기계인지를 보여줬다고. 시어러는 커리어 내내 빛나는 득점 본능을 발휘했고 뉴캐슬 뿐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260득점)이다. 2위인 웨인 루니가 208득점이기에 당분간은 깨지기 힘든 기록일 듯. 하필 1,2위 모두 탈모라는 (굳이 찾아낼 필요 없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탈모 축구선수가 그렇듯, 시어러도 젊은 시절엔 머리숱이 풍성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M자의 징후가 보이긴 하는 등 세상사에 초연한 현재의 머리숱은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다양한 득점 기술을 갖춘 선수로 좋은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헤더에도 능했는데, 잦은 헤더가 탈모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축구인들 탈모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 물론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가 없다. 시어러는 탈모로 인해 앞머리가 뒷머리에서 섬처럼 분리된 머리스타일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영국 현지에선 ‘앨런 시어러 아일랜드’ 스타일로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축구팬이 그냥 삭발하길 추천했다는 이야기까지. 축구선수의 헤어스타일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보다.
빛나는 시어러가 유독 빛났던 이 시즌의 기록들
•UEFA 유로 1996 득점왕, 베스트 11 선정
•1996년도 발롱도르, 피파 올해의 선수상 모두 3위에 랭크
•1996-97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1994-95 ~ 1996-97 3시즌 연속 득점왕)
-지네딘 지단 1997-98 유벤투스 홈
현대 프로축구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그랜드슬램의 주인공. FIFA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 UEFA 유로 우승과 MVP,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UEFA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까지 한 축구선수가 일생동안 이 중 하나마저도 달성하기 어려운 것들을, 지단은 그리 길지 않은 커리어 동안 다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장엄한 빛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즌이 바로 1997-98 시즌.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소속팀인 유벤투스를 세리에 A 우승은 물론이고 1996-97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챔스 결승에 안착시킨 것도 모자라, 자국에서 열린 1998년도 프랑스월드컵에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단지 소속된 팀 성적에 올라타기만 했다면 빛 좋은 개살구. 지네딘 지단은 말이 필요 없는 개인 실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피치 위 가장 ‘빛’나는 판타지스타로 활약하며 해당 년도 개인 수상까지 독식했다.
데뷔팀인 FC 지롱댕 드 보르도 시절의 지단을 보면, 지금의 헤어스타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한다. 빽빽하고 두꺼운 머리숱들은 그의 실력이 전 세계에 두각을 알리게 되는 유벤투스 시절부터 슬슬 사라지게 되는데, 이 정도면 축구력과 머리숱은 반비례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초기에는 M자 형태가 뚜렷한 정도였었는데, 유로 2000 우승,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이적 이후 숙원인 챔스 우승 시절을 보면 빛 나는 커리어만큼이나 머리도 찬란히 빛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감독으로도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3연패를 이끄는 등 선수 시절만큼이나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데, 좋은 피지컬에서 나오는 슈트 핏 + 운명을 냉엄히 받아들인 완삭에서 풍기는 간지 또한 돋보이고 있다.
빛나는 지단이 유독 빛났던 이 시즌의 기록들
•1998년도 프랑스 월드컵 우승, 골든볼 수상
•1998년도 발롱도르, 피파 올해의 선수상 수상
•월드사커 선정 올해(1998년도)의 선수
-티에리 앙리 2003-04 아스널 홈
아스널의 2003-04 시즌 ‘무패우승’을 이끈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킹’ 티에리 앙리. 앙리는 해당 시즌에도 리그 30득점 9어시스트로 활약하며 득점왕에 랭크. 소속팀이 ’26승 12무’ 라는 대업을 달성하는 데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앞서 소개한 지단과 함께 프랑스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98년도 월드컵 우승, 2000년도 유로우승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한 앙리는 득점이란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벨이 되어 프로 소속팀을 이끌었다. 무패우승에 앞서 2001-02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하며 소속팀 리그 우승을 견인했고 2002-03 시즌에는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20-20을 달성, 물 오른 공격감각을 선보이며 차원이 다른 클래스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 어떠한 기록도 ‘무패우승’ 이라는 단어 앞에선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 티에리 앙리의 커리어 역사상 가장 빛났던 저지를 꼽기에 2003-04 시즌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커리어 초창기부터 이미 완삭을 스타일로 정립한 덕에, 앙리가 탈모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축구팬들도 꽤나 있다. 다만 프로 데뷔인 AS모나코 시절에는 역시나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했던 것을 보아 운명을 직감하고 완삭을 한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넓은 이마라 시도한 완삭 스타일이 어느새 아이콘적 이미지로 굳어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선수 생활을 마감할 즈음 확연해진 헤어라인을 보면 이 선택 또한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굴 하단부에 나는 터럭들은 풍성한 편인데, 머리와 수염의 현황이 테스토스테론의 활발한 분출로 인한 결과물인 것으로 본다면, 대머리가 서구에선 섹시 아이콘으로 꼽히는 것에는 꽤나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헤더와 탈모의 인과관계까지 따져본다면 글쎄,,, MBC 무한도전 출연에서의 ‘물공헤딩’도 지금의 헤어라인에 꽤 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빛나는 앙리가 유독 빛나던 이 시즌의 기록들
•2003-04년도 UEFA 베스트 11
•2003-04 프리미어리그 득점왕(2003-04 ~ 2005-06 3시즌 연속 득점왕)
•2003-04 유러피언 골든슈 (리그 30득점 9어시스트), 시즌 통산 총 39득점 14어시스트
•2003,04년도 FIFA 올해의 선수 2년 연속 2위
-베슬리 스네이더르 2010-11 인터 밀란 홈
단일시즌 임팩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 무리뉴 감독 커리어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인 2009-10 시즌 인터 밀란 트레블의 주역이자 네덜란드 국가대표 황금기의 아이콘인 베슬리 스네이더르다. 스네이더르는 무리뉴 체제의 필수불가결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이전 클럽들에선 채 만개하지 못했던 기량을 완전히 꽃 피웠는데, 이를 통한 국가대표에서의 성적 향상까지 2010년도는 스네이더르의 선수 생활을 통틀어 가장 빛났던 한 해로 꼽기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이 시즌 발롱도르를 못 받은 걸로 ‘스네이더 발롱도르’ 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 붙을 정도.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스네이더르의 전성기는 그 단일시즌 임팩트의 위력에 비해 지극히 짧아서 많은 축구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저지는 2010-11 시즌의 인테르 홈킷. 2009-10시즌의 업적인 리그 우승, 리그컵 우승, 챔스 우승, 클럽 월드컵 우승 패치까지 더해지면 인테르의 저지는 그 순간 단순히 축구 유니폼이 아닌 명품이 된다. 아쉽게도 명품을 구하지는 못했다.
풍성했던 과거를 찾기 힘든 선수. 아약스에서의 프로 데뷔 때부터 이미 확고한 M자 라인이 구축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맘고생을 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용단이 빨랐다. 대부분의 커리어를 반삭 또는 완삭 스타일로 고수한 것. 완삭 스타일에서의 M자 라인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간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특히 옆모습에서 그 특유의 간지가 철철 넘쳐흐른다. 사실 아우라가 헤어라인을 커버하는 걸 수도 있겠다. 모발은 비었어도 간지는 채웠달까. 자로 잰듯한 패스와 빠른 공수전환을 이끌던 인테르 시절의 스네이더르는 확실히 섹시했다. 전성기 이후 헤어라인이 급격히 깔끔해지는 시점이 오는 걸로 보아 모발이식을 받은 걸로 추정되는데, 그런 걸 보면 다시 한 번 머리숱-축구력 반비례 이론을,,, 그만하도록 하자.
빛나는 스네이더가 유독 빛났던 이 시즌의 기록들
•2010년도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 실버볼, 브론즈부츠 수상
•2010 FIFPro, UEFA, FIFA 월드컵 베스트 11 선정
•2009-10 UEFA 올해의 미드필더, 챔피언스리그 도움왕
-데이비드 베컴 2007-08 LA갤럭시 홈
우리들의 기만자. 패션 빡빡이. 데이비드 베컴. LA 갤럭시 입단식에서부터 삭발 간지를 뽐냈는데, 뛰어난 축구실력을 가려버린 더 뛰어난 미모가 다른 의미로 빛을 발했기에 선정한 저지이다. 축구스타이자 패셔니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커리어 내내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거의 소속팀마다 한 번은 삭발 스타일을 선보였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뭐 뭘 해도 잘생겼으니 심심하면 밀었던 거 아닐까. 앞서 소개한 운명적 삭발러들과 결이 다른 선택적 삭발러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필자에게 처음으로 삭발이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축구선수이기에, 그 또한 탈모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에 머리가 빛나는 선수들 사이에 끼워 넣어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머리스타일과 축구실력의 혼연일체가 이루어지는 앞선 선수들이, 상위 1% 외모에 머리숱마저 많은 베컴보다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음,,,아무튼 그렇다.
사실 베컴의 패션 빡빡이 역사를 얘기하자면 좀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커리어 초기 긴 금발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베컴은 1998 프랑스 월드컵 16강전에서 불필요한 태클로 인한 퇴장을 비롯한 부진으로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절치부심한 그는 정신무장의 의미를 담아 삭발로 다음 리그 시즌을 맞이했다. 이때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사상 최초 트레블을 달성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일약 슈퍼스타로 도약했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신무장의 표현이었던 삭발마저 패션으로 소화해버린 빛나는 외모로 인해 영국 청소년 사이에 삭발을 유행시키기도 했다고. 이후로도 베컴은 다양한 이유로 삭발 스타일을 시도했는데, 퍼거슨 감독에게 모히칸 헤어 들켜서 삭발, 레알 시절엔 팬들의 헤어스타일 질타에 삭발 등등이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삭발을 본의 아니게 유행시켰다고.
빛나는 베컴이 유독 빛났던 이 시즌의 기록들
이라고 하기엔 사실 베컴이 이 시즌 MLS에서 기록한 것은 2007, 2008년도 통 틀어 30경기 5득점이 전부다.
그러나! 베컴이 이 당시 MLS로 이적한 것을 두고 상당한 논쟁이 되었었는데
그 이후로 10년이 지난 지금. 그게 모두 베컴의 꿈인 축구 구단주를 향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머리숱만큼이나 풍성한 비즈니스 감각까지 대체 부족한 게 무엇일까 싶다고.
이 칼럼을 쓰면서도, 하나 둘 키보드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자니 애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배운 것은, 헤어라인을 압도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우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는 없지만 그들 또한 같은 인간이기에, 커리어가 완숙해질수록 후퇴한 헤어라인에서 많은 고뇌가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풍성했던 어린 시절엔 철없이 조롱하기도 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안다. 엄숙한 탈모신에게 ‘나는 아니겠지.’ 란 허술함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주의 거대한 운명은 언제고 우리에게 생채기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알아두길. 1. 탈모는 오기 전에 미리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2. 주어진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분명 매력적입니다.
축구팬들의 머리숱에 평화를.
글 – 정인천 에디터 (@jeongincheon)
사진 – @Over_The_P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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